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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에 부쳐
해설  2017-05-16 11:45:14, 조회 : 215, 추천 : 12
얼마 전 김종길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탄제’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이다. 특히 첫 애를 낳아 기르던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시인의 부음을 접하고 불현듯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이 글을 쓴다.



             성탄제(聖誕祭)

                                                                         김 종 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아버지께서는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다. 남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푼 것은 아니지만,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신 착한 분인지라 동네 사람들의 평판이 좋았다. 비록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셨지만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오사카에서 노가다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웬 오사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당시 내 고향 남해 사람들은 일본에 많이 건너갔다. 우리 외갓집도 어머니가 열 살 때(1940년)를 전후하여 도쿄에서 몇 년간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하숙을 쳤을 정도니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분이 아니었다.

이런 아버지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술을 매우 좋아 하신 것이다. 농사일이 없거나 집에 일이 없을 때는 동네 술집에서 이웃 어른들이랑 날이 저물 때까지 술을 마셨다. 게슴츠레한 눈, 약간은 비틀거리는 몸. 그런 날은 보통 어머니와 말다툼이 있었다. 집안일을 놔두고 왜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냐였다.

술 마신 날은 평소엔 하지 않던 가슴 속에 묻어 놓으신 얘기를 몇 번이나 한 얘기 또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주된 내용은 어린 나이에 객지로 나가 소식도 없는 큰 딸에 대한 걱정,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대접받은 것에 대한 울분, 가난하여 너밖에 뒷바라지할 수밖에 없으니 네가 나중에 형제들을 도와주라는 그런 얘기였다.

나는 그런 것들이 싫었다. 술에 취한 모습도 보기 싫었고, 어머니와 싸우시는 것도 싫었고, 나중에 형제들을 돌보라는 말도 싫었다. 어린 나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나는 지금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데 아마도 그때 생긴 트라우마가 아닌가 싶다.

내가 스물두 살 때 쯤인가. 그 날도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고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셨다. 나에 대한 평소의 마음속의 불만까지 더하셨는지 술주정이 심하셨다. 나도 오랫동안 쌓였던 감정이 폭발했나 보다. 나는 손가락을 잘랐고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몇 달 쯤 후인가. 아버지는 당신께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된 연유를 담담히 얘기해 주셨다. 남의 집 일을 하러 갔을 때 배가 고파 술을 마시게 된 것이 버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로 누님 네 분과 형님 한 분을 둔 막내로 태어나, 재금날 때 논 한 뙈기와 밭 한 뙈기를 받아 나오셨다. 살림을 일으키자니 남의 집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시절엔 밥이 배부르게 나왔을 리가 없다. 하지만 술은 만만하게 여기던 때라 많이 나왔던 모양이다.

나는 아버지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딸만 셋을 낳다가 아들이 태어나니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아들 낳았다고 서너 번이나 술을 얻어 마신 동네 사람들도 있었단다. 게다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여 아버지의 기대가 컸었다. 학교에서 받아 온 상장이나 반장 임명장을 벽에 붙여 놓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가서 스물다섯 살에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까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필요하다면 묻지도 않으시고 충분한 돈을 부쳐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내게 심하게 화를 내신 적이 없었다. 심한 말을 하신 적도 없었다. 그러나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격하셨다. 한 번은 집에 있는 계란을 훔쳐 팔아 과자를 사 먹었는데 이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나는 훔친 적이 없다고 말했고 아버지께서는 거짓말하는 것은 나쁜 거라고 벌을 주셨다. 그 때가 겨울이었는데 나는 옷을 다 벗은 채로 사립문 밖에 한참동안 서 있어야 했다. 또 내가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몇 년 간 집에 내려가 놀고 있을 때에도 속으로는 무척 마음이 상했겠지만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는 식으로 지켜보시기만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밖으로 보기와는 달리 내게 뭔가를 많이 해 주고 싶어 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삼천포 장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읍내에도 나가 본 적이 없었으니 아버지께서 크게 마음을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삼천포에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배는 해안가 몇 개의 마을을 돌아 사람들을 태운 후 삼천포로 간다. 삼천포 장에서 점심으로 국밥을 먹고 기차 가는 것도 구경한 후, 나를 서점으로 데리고 가셨다. 사고 싶은 책을 골라 보라고 하셨다. 서점에 처음 간 아이가 뭘 알겠는가. 고르고 보니 ‘흑두건’이라는 만화책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의 가을날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던 우리 동네 친구네 집에 마침 놀러 가 있었다. 저녁에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가 아주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너네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단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황망한 일이었다. 집에 가보니 이미 상을 치른 후였다. 생전에 당신께서 봐 두신 곳,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는 뒷산 밭, 아래로 저만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모셔져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한 분이셨다. 문중 일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한 번도 성묘 가보지 않았던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산소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어떤 분 묘인지 말씀은 없으셨다. 어머니께서 누구 묘라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아마도 증조할아버지 대의 정식 할머니가 아닌 분 묘였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한식날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간 적이 있다. 우리 집안은 한식 때는 성묘를 하지 않았는데 그 해는 마음이 내키셨나 보다. 그 날 산소가 있는 밭 언덕에 붉은 철쭉은 왜 그렇게 만개했던지!

그런 당신께서는 내가 동성동본인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크게 충격을 받으셨으리라. 그예 스스로 세상을 버리셨다. “민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그래라”는 마지막 말씀만 남기신 채.....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집사람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당신에 대한 그리운 추억을 나 혼자 간직하고 싶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만일 아버지와 나의 아픈 기억이 업보라면 그 업보는 나 혼자 지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갈 날이 멀지 않았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누군가에게 한 번은 하는 것이, 아들을 깊이 사랑하시고도 외로이 가신 그 분의 혼백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白下
흠~ 해설의 사망부가(思亡父歌) 잘 들었습니다.
평소 과묵한 해설이 개인사를 얘기하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많은 부분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구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기대에 비해 아들은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엇박자로 일관해 끝내 아버지를 상심케 했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려울 것 같소. 평생 혼자 간직할 수 밖에 없는 사연, 몇 대목에서는 읽는 이의 가슴도 짠해지는구려.
아무튼 무정한 세월은 흘러가고... 그래도 자식 농사 잘 지어서 아버지의 은혜에 일부 보답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2017-05-16
12:45:12

 


목옹
진실은 선하고

그리고 또 아름답습니다.

인생이 슬픈데도 아름다운건

삶이 숭고하기 때문이겠지요.

그 삶이 부담스럽습니다......
2017-05-18
05:44:55

 


해설
오오! 목옹께서 오랫만에 마실 나왔네. 같은 일산 땅에 살아도 얼굴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27일 한 번 보십시다.

입시 제도가 바뀌어 대입 논술이 없어질거라고 하는데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궁금합니다.
2017-05-19
00:48:15

 


수인
아버지와의 관계(생물학적 + 사회적, 즉 규범적)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는 못해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건 분명하다. 특히 모든 가능태들이 싹 틔우는 유년기에 그렇다.

아버지는 모순적 존재요 이율배반적 존재다. 가시고기의 부성애를 십이분 수긍하면서도 "애비가 일찍 죽은 행운" 운운한 샤르트르의 '망발'에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이유다. 내 젊은 시절의 방황의 단초도 결국 절대 군주 아버지에 대한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해설의 손가락 한 마디의 행방에 대해 잠시 궁금해한 적이 있는데....
2017-05-22
21: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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