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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우에쓰다 | 나룻배



春信
수인  2017-03-24 23:31:11, 조회 : 299, 추천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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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만난 복사꽃 -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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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유명한 對句가 있다. 曰,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꽃은 비슷한데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

<代悲白髮歌>의 이 구절을 듣고 사람들은 공감해 마지않지만, 오늘 산책길에 핀 꽃을 보면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핀 꽃과 올해 핀 꽃은 닮긴 해도 다른 꽃이다. 닮은 것은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같은"이라고 해야겠지만) 유전 정보를 토대로 생겨난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올해 꽃을 구성하는 요소는 작년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람은 어떨까? 사람의 주기는 꽃의 주기보다 길다는 차이뿐이다. 봄에 핀 꽃이 여름이 오기 전에 시들어(늙어) 떨어지듯이(죽듯이) 사람은 대체로 100년 안쪽에 늙어 죽는다. 그리고 다른 환경(三界六道)에서 비슷한 정보(業)에 의존해서 몸을 받는다. 물론 윤회설에 의하면 그렇다는 말인데, 꼭 윤회설을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꽃과 사람의 대비가 그다지 적확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긴치 않은 소리고......

요즘은 '所謂 道'가 금세 손안에 잡히는 것도 같고, 어쩌다가 발에 밟히는 것도 같다. 道에 관해서는 입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속 있는 말을 뱉어 놓았지만, 그 말들을 따라다니다가는 평생 道의 그림자도 보기 어렵다. 道가 말에 있지 않다는 건 古今東西의 '아는 이'들이 모두 이르는 바이지만, 그게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는 또 드물다.

道가 말에 있지 않다는 건
"생각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생각에 있지 않다는 건
과거나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間註) 과거나 미래의 일은 모두 생각 속의 일이다. 그러면 현재의 일은? 물론 현재의 일도 생각속의 일이다. 생각은 시시각각 흘러가는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생각은 의식이 조립한 것이어서 매우 둔탁하고 고정적이다.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그 현재는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 미래의 마음, 현재의 마음 모두 붙잡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경전은 모호한 신비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우리의 상식, 즉 생각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상식적 차원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우리가 과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의 일도 결국 "현재의 생각"속의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은 오직 현재 이 순간뿐이다. 그런데 間註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찰라간에 변화해가는 현재를 무능한 도구인 생각으로 알 수도 없고 붙잡지도 못한다. 그래서 생각 속에서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다.

산다는 건
지금 흘러가는 현재를 사는 것인데,
그 흐름, 변화를 살기 위해서는
생각으로 붙잡으려 하지말고
순간순간 다가오는 대상(혹은 사태 혹은 경험)에
바로 應해야 한다.

길을 걸으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해보면, 거의 99% 이상 어떤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의 대상은 물론 멀거나 가까운 과거나 미래다. 하도 빨리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 순간"은 인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변화와 함께 하려면(즉 산다 싶게 살려면) 나의 감관이나 의식을 제어하지 말고 자유롭게 해야 한다. 더우면 더위에 應하고 추우면 추위에 應한다. 쾌감이 있으면 쾌감에 應하고 고통이 있으면 고통에 應한다. 應한다는 것은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관찰한다, 혹은 경험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쾌감도 고통도 아닌 그 무엇이고,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물론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는 生滅도 없고, 憂悲苦惱도 없다. 그것을 "영원한 현재에 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永遠'도 생각이 만든 허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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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조금, 혹은 상당히 난삽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난삽함이 사고의 미숙이라기보다는(思辨의 결과물이 아니므로) 경험한 바를 근사하게 재현하는 능력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렇더라도 누구에겐가는 약간의 참고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억측에서 두서없이 기록한다. 앞으로 3월말까지는 눈코 뜰 새가 없을 듯하다. 추후에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보고 표현의 정확성을 제고할 생각이다. 나는 美文은 혐오하지만, 언어의 태생적 한계인 모호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해설
매화를 보니 안민영 매화사 중의 한 구절인 "암향(暗香)조차 부동(浮動)터라"가 떠오른다. 황혼 무렵 은은한 매화향에 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씁쓸한 소주를 곁들이면 더욱 좋을 듯. (지금 그 씁쓸한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습니다. 역시 소주는 안주 없이 마시는 것이 제격인 듯)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해 보겠습니다. "눈 期約 能히 직혀 ", "눈 속에 네로구나", "바람이 눈을 모라 山窓에 부딋치니", "乾坤이 눈이 여늘 졔" (매화사)와 같은 구절을 보면 매화는 눈이 올 때 피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매화는 눈이 다 녹은 초봄에 핀다. 안민영은 실제 매화를 보고 이 시를 쓴 것일까 아니면 관념 속의 매화를 노래한 것일까?


"요즘은 道가 금세 손안에 잡히는 것도 같고, 어쩌다가 발에 밟히는 것도 같다" --- 흐흐, 수인께서 새삼스럽게. 이미 도통한 경지이신데...


이제 수인이 말한 내용에 대해 내 견해를 말해 보겠다. (내가 수인의 얘기를 수인이 의도하는 맥락에서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상(혹은 사태 혹은 경험)에 바로 應해야 한다"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생각"의 연결이 내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감수성과 개념을 통한 사유"의 대비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감수성이 살아 있다. 그래서 외계의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자신의 감정까지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람은 '개념'을 통해 사유하게 된다. 개념이란 '추상'이다. 즉, 구체성이 사라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사물을 그 자체로 받아 들일 수가 없다.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그 내용대로 인식하게 된다.

가령 매화를 볼 때 어린이는 '실제하는 그 어떤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개념적 사유를 하는 어른은 '매화'를 인식한다. 그런데 그 매화는 '개념'이다. 또 찬 물에 손을 넣었다고 해 보자. 어린이는 '그 어떤 찬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어른은 '차갑다'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에 응하는 것"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쾌감도 고통도 아닌 그 무엇이고,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은 일관성이 없는 얘기가 아닐까? 현재에 응한다는 것은 고통이나 쾌감을 더울 생생히 느끼기 위해서 아닌가? '자유롭다'는 것은 관념이다. 즉 개념을 통해 한 번 정제된 것이다.

개념을 통한 사유의 세례를 받은 성인이 "대상에 바로 應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천국'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옛날은 아름다운 추억일 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그것이 좋은 것인가?' 나는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어렸을 때로, 나이 들었을 때는 나이 들었을 때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만일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한 번 웃자. 흐흐흐... 2017-03-25
05:13:26
2017-03-25
08:22:10

 


수인
1. 해설이 어린이의 감수성과 어른의 개념으로 양분해서 이해한 것은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싶다. 感受(feeling)를 개념으로 구성하기 전의 인식 단계로 정의한다면 비슷한 얘기같기도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아이들이 개념작용이 “미숙해서” 감수에 머문다고 해서 변화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어른들이 개념에 치우쳐 있다고 해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개념에 매이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회 통념에 따라 소통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변화를 변화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2. 가령 불교의 道 닦는 법(내가 참고한)은 “내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 - 내 몸의 움직임이나 감각, 생각, 심지어 개념까지-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들은 빠르게 변하면서 흘러간다. 그래서 그것을 변화 그대로 관찰하는 훈련을 통해서(생각을 가지고는 되지 않으므로) 실상에 접근하는 훈련을 한다.

3. 본문에서 ‘영원한 현재’라는 말을 쓴 후에 관념의 위험성을 고지했는데 “자유롭다”는 말을 쓴 후에는 경고를 잊었다. 전자를 보았으면 후자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아무튼 해설의 댓글 덕분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더 부연할 기회를 얻었다. 감솨!
2017-03-25
08:40:12

 


수인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머리는 단어와 구문을 생각하느라 바쁘고, 의자에 앉은 몸도 복잡한 작용을 한다. 눈은 모니터를 보고, 허리는 명문혈이 열리게 자세를 잡고, 손가락은 자판을 두드린다. 이 모두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실시간 현상이다.

(그 외에 그 현상들을 구성하는 개념들 - 글 쓰고 있는 나, 손가락, 자판, 침침한 눈, 손가락 끝의 촉감 - 과 그 개념들을 조합해내는 생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에 대한 그림, 내지 模寫이다.)

감각이든 개념작용이든 ‘나’의 안팎에서(실은 안쪽뿐이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실상을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을 갖는” 인지작용(생각)으로는 파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가운데 한 가지 (가장 두드러진 것, 혹은 주의를 집중하기로 선택한) 대상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가령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서 그것을 온전히 느끼게 되면 두서없이 일에 쫓기던 때와 현격하게 다른 편안함이 있다. (물론 여기서 ‘편안함’이란 ‘나는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념작용으로 재구성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걸을 때나 밥 먹을 때나 담소를 나눌 때(이 때는 좀 어렵지만)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어떤 동작이나 느낌에 주의를 집중해보면 묘한 평안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당장 해보면 안다.
2017-03-25
09: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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